[테마있는 명소-힐링투어] 강릉 오죽헌-겨레의 어머니ㆍ민족의 스승 태어난 성지

메인뉴스_관리자 기자 2017-10-11 13:43:06

 

우리 역사상 최고의 현모양처로 칭송받는 신사임당의 목소리는 어떠했을까. 남편에게 바가지는 긁지 않았을까. 일곱 자녀나 낳아 키우면서 목청 높인 일은 없었을까.

강릉 오죽헌을 여행하던 나에게 최대 관심사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다.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의 여행, 한여름의 무더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눈으로 보는 여행이라기 보다 마음 속으로의 여행을 한 것 같다.

1504년(연산군 10)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이씨 사이에서 다섯 딸 중 둘째인 신인선(申仁善ㆍ1504~1551)이 태어났다.

신인선이 태어난 곳은 강릉의 북평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시와 글씨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감성이 풍부한 소녀였다. 그리고 둘째 딸로서 늘 어머니 곁에서 함께 말벗이 되어주며 생활했다.

신인선은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한동안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 이씨 역시 강릉 외조부 참판 최응현 밑에서 자랐다. 즉 모녀가 모두 친가가 아닌 외가에서 태어나고 살아 눈길을 끈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의 우리의 가족문화가 여성의 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눈여겨 볼 만 하다.

오죽헌 경내 광장
오죽헌 안채의 별당건물

신인선은 어머니와 오랜 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의 천부적인 시와 그림 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아버지 신명화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18세손이다. 학문은 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재야에 남은 덕에 조광조 등 신진사림이 처형 당한 기묘사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신인선은 19살이 되던 해 한양에 사는 덕수이씨 가문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해 4남3녀를 낳았다. 이 중 셋째 아들은 33살에 낳은 이(珥)다.

그가 율곡 이이(李珥)다. 그리고 신인선은 그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초상화

 

우리는 신사임당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인선, 요즘 들어도 꽤 있을 법한 이름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다.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지덕을 겸비한 태임(太任)의 여성상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지은 호다.

태임은 성품이 올곧고 오로지 덕(德)을 실행한 최고의 여성상으로 특히 자녀교육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문왕을 임신했을 때는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거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아 아들을 훌륭한 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임산부들의 태교도 그러하다.

이렇듯 인품은 태임을 닮고자 했고 자신의 천부적인 시와 글씨, 그림의 재능은 안견(安堅)의 작품을 보며 독학해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던지 풀벌레 그림을 그린 후 볕에 말리려 마당에 내놓자 닭이 먹이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찢어질 뻔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 산수도(山水圖)와 초충도(草蟲圖) 등이 유명하고 사친(思親) 등의 시도 후세에 길이 남겼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신사임당의 수작 '초충도' 중 일부

이렇게 보면 신사임당은 그 자신이 이미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예술인 반열에 올라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 ‘현모양처’라는 편협된 시각으로만 보려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훌륭한 학자를 낳아 교육하고 키운 어머니로서의 인품도 당연히 인정받아야겠지만.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기 전날 밤 용이 나타난 꿈을 꾸었는데 율곡이 태어났다. 그래서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른다.

율곡 이이(1536~1584)는 1548년(명종 3) 13세에 진사시(進士試) 합격을 시작으로 생원시(生員試) 등 아홉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해 사람들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율곡이 장원을 독식했으니 그와 동시대에 과거 본 사람들은 그저 붙기만 해도 다행으로 여겼다.

 

이율곡이 태어난 방 '몽룡실'이다. 정사각형의 작은 방이다.

 

율곡은 너무나 많은 벼슬을 해서 일일이 거론하기 조차 어렵다. 하지만 말년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최고의 지성인임을 입증했고 우리 민족의 대스승으로 칭송받고 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두 모자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갔다. 신사임당이 48세, 율곡은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50년도 못 산 그들이지만 500년이 지나도 그들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4개의 지폐 중 무려 2개에 이들 모자가 등장했을까. 반만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다.

5만원권 화폐의 인물은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의 초상과 묵포도도와 자수초충도, 월매도와 풍죽도가 있다. 초충도 중 가지가 옅은 색으로 등장한다. 월매도와 풍죽도는 조선중기 매화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어몽룡과 이정의 작품이다.

5천원권 화폐의 인물은 율곡 이이다. 지폐에는 이이 초상과 오죽헌, 오죽, 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중 수박과 맨드라미가 디자인 돼 있다. 수박은 다산을, 맨드라미는 벼슬을 상징한다.

 

사상 초유, 모자가 각각 화폐의 인물로 등장하는 영광도 누리고 있다.

오죽헌(烏竹軒)은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넷째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물려준 집인데 권처균은 집 주변에 ‘까마귀 처럼 검은 대나무 숲’이 있다 해서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불렀으며 집의 이름도 그렇게 불리게 됐다.

그러니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집이지만 훗날 율곡의 이종제(姨從弟)인 권처균이 오죽헌이라 부른 것이고 오늘날에는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성지’로서의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까마귀 처럼 검다 하여 오죽. 문성사 주변을 감싸며 자라고 있다.

강릉의 외가에서 본명이 지어진 이이는 훗날 그의 친가가 있는 파주 율곡리의 지명을 따 호를 ‘율곡(栗谷)’이라 했으니 율곡 이이에게는 강릉과 파주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다.

 

매표소 정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율곡 선생 동상이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 사상가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과연 율곡 선생다운 문구도 눈에 띈다. ‘견득사의(見得思義)’다. ‘이득을 보았으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온갖 비리에 오염된 사회에 점잖게, 그러나 강하게 내리치는 ‘회초리’ 같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넓은 화단이 조성돼 있는데 신사임당이 초충도에 소재로 한 식물을 실제 심어놓은 ‘초충단’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말 그대로 식물과 곤충들이다. 여덟폭 병풍에 등장하는 참외, 수박, 가지, 맨드라미, 원추리, 양귀비, 여주, 봉숭아 화단이 조성돼 있다. 초충도에는 이들 식물과 함께 나비, 개구리, 풍뎅이 등 곤충과 동물들도 등장한다.

 

계단을 오르며 자경문(自警門)을 들어서면 깔끔하게 단장된 넓은 광장이 있고 저 멀리 정면에 율곡기념관이 마주 보인다. 광장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오죽헌과 문성사(文成祠)다. 이 오죽헌 건물은 안채와 구분해 별도의 담장을 쌓아 지은 별채다.

문성사는 율곡 선생의 사당이고 왼쪽의 작고 아담한 전통한옥이 오죽헌이다. 정면 3칸 중 가운데에 ‘오죽헌’, 오른쪽에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이 오른쪽 방 몽룡실이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을 낳은 방이다. 가로 세로 3m도 안 되어 보이는 정사각형의 이 작은 방에서 조선 최고의 학자가 탄생했다.

방 왼쪽으로는 두 칸 넓이의 마루인데 율곡 선생이 6살때까지 학문을 배우던 곳이다.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 기운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오죽헌 건물. 가운데는 '오죽헌', 오른쪽 방문 위엔 '몽룡실'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마루에는 관광객을 위해 좋은 문구도 전시해 뒀다. ‘사람을 상대하는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를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고 하는 율곡 선생의 저서 ‘격몽요결’의 한 구절이다. 도탄에 빠진 ‘인성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이 건물은 꼭 관심있게 봐야 할 집이다. 조선 중종 때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당연히 보물(제165호)로 지정됐다.

4면을 굵은 댓돌로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해 네모기둥을 세웠다.

 

오죽헌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참배하는 문성사는 원래 어제각이 있던 자리로 1975년 정화사업 때 어제각은 사랑채 건너편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다. ‘도덕과 학문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전한 삶을 위해 정사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입구 쪽에는 600년 넘은 목백일홍, 즉 배롱나무가 고목의 풍취를 자아내며 율곡 선생과 벗으로 지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임당은 어린 아들과 이 나무를 어루만지며 정원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삭이듯 설명해줬을 것만 같다. 이 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새싹이 돋아 자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목백일홍과 옆의 노송인 율곡송, 그리고 율곡매(梅)는 오죽헌을 지켜온 나무들이다.

 

문성사. 율곡 선생을 참배하는 곳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의 벗이 되어주었던 목백일홍. 고목의 자태도 아름답다.

율곡 선생은 두 그루의 노송에 대해 “한참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라며 ‘소나무 예찬’을 했다.

 

오죽헌 건물 뒤쪽 협문을 통해 들어서면 사랑채(바깥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안채가 있는 ‘ㅁ’자형 본채가 나온다. 바깥채는 폭이 좁은 건물인데 앞쪽으로 툇마루까지 설치해 아담한 정자 분위기를 연출한다. 앞쪽 기둥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안채는 1996년 고증해 복원한 건물이지만 오죽헌과 사랑채는 율곡 선생 당시의 건물인 만큼 그 풍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겠다.

 

본채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맨 앞의 건물은 사랑채다.

 

안채 옆 별당에 전시된 신사임당의 시 ‘어머니를 그리며(思親)’를 잠시 따라 읽어본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리 (千里家山萬疊峰)

꿈 속에도 오로지 고향생각 뿐 (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海門漁艇任西東)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 가 (何時重踏臨瀛路)

비단옷 입고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꼬 (更着斑衣膝下縫)”

홀로 사는 어머니와 떨어져 있을 때 지은 시로 신사임당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할 것 같다.

 

사랑채 화단을 지나 산비탈 쪽 협문을 나가면 작고 예쁘게 생긴 건물, 어제각(御製閣)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오죽헌에 율곡 선생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가져오게 해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격몽요결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내려 보냈는데 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어제각이다. 벼루는 율곡 선생이 어릴 때 쓰던 것으로 매우 작으며 예쁘게 생겼다.

 

어제각 내부. 율곡 선생이 어릴때 사용했던 벼루와 저서 '격몽요결'이 비치돼 있고 5천원권 지폐도 보인다.

다시 사랑채 앞에서 앞쪽 문을 통해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율곡기념관이 있다.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가족인 매창ㆍ옥산 이우 등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또 광장에서 입지문(立志門)으로 내려가면 향토민속관과 강릉시립박물관이 있어 강릉에 전래되어 온 민속품들을 볼 수 있다. 정원에는 신사임당의 동상이 있다.

 

신사임당과 이율곡 동상.

고맙게도 여행은 늘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누군가가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혹시 가졌을지도 모를 오만과 편견을 깨끗이 지운 채, 백지 위에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만을 순수하게 그리고 돌아오게 한다.

이 오죽헌 역시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봤다는 그것 보다, 이 터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몇 백년 후손들에게까지 길이 본받을 자양분을 제공했다는 느낌표 하나를 받아서 올 수 있다면 이 여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자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