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의 변화, 환경과 현실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는 가요 시장
2023-12-10

한문화의 기반에서 한글의 성장은 말할 수 없는 문화적 수난을 격어 왔던 증거는 ‘언문’, ‘암글’ 등 여러 비어들이 난무한 구비전설만 보더러라도 가히 짐작 할 수 있는 어려움이었다. 조선시대가 마감하고 36년간 한글의 수난시대를 거치면서 한글은 기억조차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 광복이후 자연스럽게 한글이 민족의 언어와 글로 제도화하면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으로 문맹률을 줄이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한글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음성학적 그리고 문자 표현 디자인이 독창성 이였지만 한자보다는 인쇄체로 사용하는 데는 훨씬 빨았으나 영어의 알파벳보다는 아주 느려 인쇄 속도가 문제 되었던 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한계성이었다.
한글의 특성은 조합형 즉 ‘자음+모음+받침=글’이 만들어지는 것 때문에 글자로 표현 하는 데는 속도가 문제 되였다. 대한민국 건국초기 엔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글자를 기계화하여 속도전에 뛰어 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장치인 ‘타이프라이터’ 일명 타자기 출시로 한글의 열등성이 크게 부각 되었다.
이런 것을 해결하고자 공병우 박사님의 창의력으로 서양 타자기의 글자를 자음을 갈아 끼어 넣어 한글을 속도와 인쇄화하는데 대성공을 이루었지만 인쇄체로의 격식은 맞지 않아 큰 불편과 모양세가 문제 되였지만 더 이상 새로운 방법이 없었다. 일본에서 한문자타자기에 한글 자를 조판하여 인쇄체화한 사연(寫硏)제품이 우리글 인쇄체 화하여 순간 시장을 석권하였다.
이시기가 전자시대 문화로 진입하는 초기에 한문, 일어 등을 전자화 하는데 성공한 프로그램이 컴바인이었다. 연도를 집어보면 1970년이었다. 우리가 배운 우리의 한글은 독창적 우수 발명품이지만 인쇄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 모음 자음 받침이 서로 다른 크기 즉 6개씩 있어야 정사각형 안에 들어가서 인쇄체화 하는 독창성이며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65-69년 교수님 교과서, 지도 등 교정 작업을 민중서관에서 하던 중 궁금하여 글자 형, 모양(디자인), 조판, 지형, 인쇄, 제본 등등을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과정을 알게 되었다. 너무 많은 과정을 거치는 것을 간단하게 줄일 수 없을 가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 거대한 물결을 해결하기는 역부족이었다.
1970년 초 유학중 프로그램화된 일본어를 만 날 때 서울에서 민중서관 과 공병우 타자기가 생각나서 이것보다 인쇄체로 다양한 서체 크기 속도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늘 머리에 곽 차 있었다. 학위논문 제출하고 시간이 있어 평소 생각하던 한글의 전자화 하는 발상을 구체화 하여 일본에서 특허를 신청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목은 ‘한글 자모자동선별방식’은 자음+모음+받침의 3개의 체를 만들어 자동으로 인쇄체 글자가 만들어지는 방법이 혁명적인 발명품이었다.
심사기간이 4, 5년 걸려 일본을 떠난 후 ‘1982년 일본특허 제 1080976호’로 특허가 나왔다. 그전에 일본 전자기술학회에 발표하여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당시 일본을 ‘신기술개발공단’ 이 좋은 아이디어 개발을 돕는 제도가 있어 그곳에서 콜이 있었지만 일본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야하기에 포기하고 특허만 받게 된 한글 전자화의 역사적 배경이다.
당시는 대한민국과 일본이 특허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특허 카피가 난무하던 시대적 배경 이지만 어째든, 1.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발명 2. 공병우 박사는 타자기 즉 기계화발명 3. 최무웅 박사는 전자화 발명 이런 과정을 거처 한글을 다양한 모양 크기로 속도를 내어 글자를 쓸 수 있는 것은 위의 세 사람의 공로이며 대한민국 발전에 큰 공적자 들이라고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1, 2는 역사 인물이지만, 3은 현존하고 있어 한글날의 감회가 남다르다.
이학박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땅물빛바람연구소 대표 최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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