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세계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에게는 언제나 그들을 대적하는 악당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악당이 저지르는 행위의 정도에 따라 히어로는 위상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그것이 곧 영화 스토리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은 악역에 주목하더니 환호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대부분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내기에 그들의 감정으로 진입하기에 훨씬 쉽다. 그래서 관객이 응원하는 주체는 주인공이지만 희한할 정도로 눈길과 관심은 악역의 행위로 더 쏠리고 있다.
올해 개봉한 국내영화 ‘공조’, ‘더 킹’, ‘조작된 도시’와 개봉을 앞둔 ‘재심’도 주인공들을 향한 호평과 함께 유독 악역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다. 단순히 극에 긴장감을 넣어주는 역할을 넘어서 주인공보다 더욱 강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700만 관객수를 돌파하며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최고 스코어를 기록 중인 ‘공조’에서는 단연 김주혁이 빛을 발했다. 첫 악역 도전이었으나 조금이 위화감도 없이 김주혁만의 섹시함을 뽐냈다. 평단은 물론, 대중들까지 모두 ‘김주혁의 재발견’이라 칭하며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냈음을 느끼게 했다.
정우성은 ‘아수라’에 이어 ‘더 킹’에서도 우스꽝스러운 악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밑도 끝도 없이 지독한 악역이지만, 풍자와 해학을 가득 버무린 영화인만큼 마냥 그 악행이 무겁지만은 않은 색다른 악역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더불어 9일 개봉한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 속의 오정세는 최고의 신스틸러다. 영화 전체를 뒤흔드는 핵심 인물이다. 어눌한 외모를 지닌 국선 변호사 민천상을 맡았지만, 어딘가 반전이 있는 인물로 오정세는 완벽히 캐릭터를 흡수해 기존 이미지를 제대로 뒤집었다.
‘재심’에는 강하늘과 정우만 있는 게 아니다. ‘검사외전’, ‘강남 1970’에서부터 얼굴을 알려온 한재영도 있다. 그는 켜켜이 쌓아온 악행(?)을 통해 ‘재심’에서 진정한 악인으로 거듭났다. 형사 역이지만 조폭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잔인한 면모를 지녔으며, 무자비하게 강하늘을 폭행한다. 최근 여타 영화에서 등장하는 전략을 세우고, 머리를 쓰는 악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폭력, 욕설 등 무자비한 행위를 일삼는 최고의 밑바닥 캐릭터다. 한재영은 실제 배우를 의심할 만큼 대단한 소화력을 뽐냈다.
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악역이 저지르는 사건사고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뇌리 속에 주인공보다 더한 공간을 내어주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주인공이 주인공다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악역 캐릭터의 일련의 행동들로 인해 가능하단 사실을 점차 인지하며 관심이 방향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덕에, 악역은 극 전체를 휘어 감는 제대로 중추적인 역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대중은 극중 악역의 모습뿐만 아니라 연기를 펼친 배우에게까지 관심을 뻗치고 있다.
악역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우들은 악역 연기에 있어서 큰 부담감을 느꼈다.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우려도 있을뿐더러,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악인으로 비춰지지 않고 우스운 상대가 되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악역이 악역의 노릇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배우로써 다양한 얼굴을 내보이고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껏 악역은 선한 주인공의 상대편에 서서 받쳐주는 역할로 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최근엔 단순히 선악구조 혹은 주인공과의 대립만을 넘어서, 악역의 삶에도 서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입체적인 악역 캐릭터가 구축된 덕분에 대중은 ‘뻔한’ 캐릭터를 보지 않아서 좋고, 창작자는 세계관을 저변 너머로까지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