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이병헌은 조용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한 도전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배우 인생에 방점을 찍었다. ‘싱글라이더’는 현재 충무로에서 강세를 띄고 있는 범죄액션오락영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화려한 액션도, 엄청난 인파들도, 현란한 연출도 없다. 조용하고 잔잔하다. 마지막에 찾아오는 반전을 제외하고는, 관객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잔잔함이 날카롭게 대중의 마음 깊이 파고든다. 이병헌은 그 감성에 제대로 반했다.
‘싱글라이더’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한 가장인 재훈(이병헌 분)이 부실 채권사건 이후 가족을 찾아 호주로 사라지면서 충격적인 비밀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감성 드라마로, 이병헌이었기에 ‘싱글라이더’ 출연을 선택할 수 있었고, 관객들은 이병헌이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도 멍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일주일 이상을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어요. 오히려 끝나고 나서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는 분들에게도 그런 감정이 전달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몇 안 되는 인물들이 나오지만 각각 다른 것들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공효진이 연기한 수진이 사실 가장 외로운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결혼한 뒤 아이를 가지고 자신의 삶이 사라지면서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대변해요. 제가 연기한 재훈은 주변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쓸쓸한 인물 같아요. 소희가 연기한 지나의 경우에는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힘든 청년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싱글라이더’는 광고계에서 종횡무진 하던 이주영 감독의 첫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입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대담한 모험에 가깝다. 하지만 이병헌과 같은 굵직한 배우들이 출연을 결심했을 때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실제로 그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아주 잘 만들어진 문학작품’이라고 표현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는 워낙 이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봤기 때문에 고민은 없었어요. 막상 촬영할 때, 현장 편집한 것을 다 함께 잠깐 봤는데 ‘이렇게 대사가 없는 영화였나?’ 싶긴 했어요. 프랑스 아트영화 같더라고요.(웃음) 그 때, 약간의 걱정은 들었어요. 자칫, 관객들에게 어필이 되지 않을까봐요. 하지만 보는 와중에는 지루함을 느끼더라도 다 본 뒤 극장을 나가서도 뭔가 계속 남게 하는 영화라는 믿음은 분명히 있었어요. 어떤 이에게는 인생 영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확신이 없으면 영화 선택을 못할 거예요.”

이병헌은 기존에 해오던 캐릭터성이 짙은 인물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한 명의 샐러리맨으로 분했다. 대단한 능력과 어마어마한 자본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주변에 그를 받쳐주는 조력자도 없고, 오롯이 홀로 묵묵하게 일상 속 남성을 연기한다. 주로 과장적이고 특수적인 상황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자연스러움을 내보여야 하는 일상적인 연기가 어렵다는 게 전반적인 시선이다. 하지만 이병헌은 오히려 부인했다.
“일상적인 연기는 실제로 저한테도 굉장히 일상적이니까 오히려 어려운 것은 없어요. 적어도 배우가 아닌 삶을 반 정도 살았고, 여전히 중학교 때의 동창들은 배우인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인 삶을 모르지는 않아요.”

앞서 말했다시피 이병헌은 대사가 거의 없다. 답답할 정도로, 공효진의 삶을 뒤따르기만 하면서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입은 꾹 닫은 채, 눈빛과 몸짓으로만 감성을 표현해낸다. 그 덕에, 관객들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역시 이병헌은 눈빛만으로도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병헌은 눈빛으로 연기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말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눈빛으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 감정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화가 나면 숨기지를 못한다’의 느낌을 눈빛에서 다 알아챌 수 있어요. 게다가 영화라는 장르는 비현실적인 클로즈업 등의 연출 기법을 쓰잖아요.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당기는 등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눈앞에서 보는 감정보다 훨씬 더 쉽게 느낄 수 있어요.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관객들은 굉장히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감정적 기운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대사가 없어도 그것이 제가 의도하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방법이에요.”
그는 늘 ‘싱글라이더’와 같은 감성에 굶주려 있었다며 들뜸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이런 연기를 원해왔고, 이전에도 이러한 장르를 해왔다며 자신했다. 3-40대 관객들은 감성 장르의 재등장에 반가움을 내비치겠지만 요즘의 관객들은 화려한 장르가 아닌 잔잔한 작품에 출연한 자신을 낯설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감히 제가 말을 하자면, 우리나라 영화계는 현재의 범죄액션오락물이 유행을 하기 전까지는 나름 다양한 장르가 많았어요. 심지어 제가 미국 처음 갔을 때도 ‘한국영화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다양하고, 장르가 정해져있어도 그 장르 안에서 결말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천편일률적으로 범죄액션오락영화들이 판을 치고 그런 것들이 잘 되기 시작했죠. 그러다보니, 그런 장르의 시나리오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배우가 보기에도, 멜로, 휴먼, 액션 등의 시나리오를 다 읽어보면 질적인 차이가 나요. 그래서 ‘싱글라이더’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더 큰 욕심이 생겼어요.”

함께 출연한 배우 공효진과 안소희는 이병헌을 향해 ‘아재 개그’를 계속해서 내보이는 사람이라며 줄곧 이야기하며 폭소를 자아냈다. 이에 이병헌은 “두 사람이 ‘아재 개그’라고 만들어낸 것이에요. 저는 정말 하이퀄리티 개그에요. 모두 진짜 웃겼을 거면서 참았을 거예요.”라고 반박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친밀감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하지만 소희와는 이전에 같은 소속사였지만 한 번도 호흡을 맞춘 적이 없었고, 공효진과는 부부로 출연했으나 함께 맞붙는 신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표현했다.
“공효진 씨와는 워밍업 수준으로 생각해요. 다음번에 다시 호흡을 맞춰보고 싶어요. 연기를 보면서 너무 잘하길래 놀랐어요. 소희 씨는 같은 회사에 있었음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표정도 다양하지 않아서 궁금했어요. 막상 작품을 함께 하니, 의욕이 넘치는 친구더라고요. 감독님께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에 대한 상담을 하고 모니터를 계속 스스로 했어요. 보통 함께 하는 배우들한테 의욕이 없으면 ‘연습 한 번 해볼까’하는 말을 못하게 돼요. 괜히 그 사람 시간을 뺏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런데 소희 씨는 열정을 보이니까 대사 맞추자고 하면 기뻐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대사를 바꿔서 해보기도 하는 그런 시간들이 많았어요.”
‘싱글라이더’는 단순히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만 꽃을 피운 게 아니다. 그의 삶 자체를 위로하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잘’ 만난 소중한 작품이다.
“사람들에게 (‘싱글라이더’를) 보여줄 생각에 너무 신이 나요. 저한테는 정서적으로는 위안이 된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선택했을 때 한창 미국에서 서부영화 촬영 때문에 사막에 있었을 때에요. 진짜 힘들었죠. 2개월 후에는 ‘마스터’ 때문에 필리핀에 갔고요. 문득, 저야말로 재훈보다 더 한 상황 속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제 삶과 많이 동일했지만 적어도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언젠가 멈춰 서서 한숨 돌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그 자체가 위안으로 다가왔어요.”
“이 작품이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몇 백만의 사람들이 와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많은 분들이 와서 좋은 감성을 얻어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물론 장르적으로 취향이 아닌 분들이 있으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갈 게 분명히 있으실 거예요. 반전을 위한 영화였다면, 두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안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싱글라이더’는 반전이 제일 중요한 영화는 아니에요. 영화 전체가 가지는 쓸쓸함이 중요해요.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니까요.”
이예은 기자 90090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