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어느 특정 배우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의 장르가 떠오른다. 하지만 김래원은 예외다. 그만큼 어떠한 장르에도 벽을 세우지 않고 자유자재로 몰입하고 소화하는 힘을 지녔다.
얼마 전까지, 드라마 ‘닥터스’의 달콤한 홍지홍 역을 통해 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그가 단숨에 거친 깡 센 남자 유건으로 변신해 돌아왔다. 영화 ‘해바라기’와 ‘강남 1970’에서의 야수 같은 모습부터 ‘어린 신부’의 철없던는 신랑의 모습까지, ‘프리즌’이라는 한 작품에서 그 모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때 검거율 100%에 가까워 저승사자로 불리는 경찰이었지만 뺑소니, 증거 인멸, 담당 경찰 매수 등의 죄목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꼴통 경찰 유건 역을 통해 김래원은 한없이 가볍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는 연기에 강한 무게를 싣는다. 진중함을 더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그 간극을 소화하는 그에게는 어떠한 어색함도 없다.
“유건 역의 어떠한 지점을 보고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재미있었어요. 교도소 안에서 세상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나 교도관이 죄수를 통제하는 게 아닌, 죄수가 교도관을 통제하는 이야기들이요. 이런 부분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나현 감독님이 직접 쓰신 이야기니까, 모든 대사와 모든 행동의 분명한 목적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좋은 도구로 잘 쓰여질 것 같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했어요.”

사실 ‘프리즌’은 나현 감독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김래원과 한석규의 손길을 거쳐 함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성된 시나리오에 두 배우의 아이디어를 더해 극의 톤을 완전히 새로 뒤집기도 하면서, 세 사람이 극의 서사와 재미를 조금씩 쌓아올렸다.
“어떤 도구로 잘 쓰일 것인가 생각해봤어요. 지금은 송유건의 캐릭터가 ‘꼴통’ 설정이잖아요. 원래는 악질 형사였어요. 지금 영화의 분위기가 조금은 무겁고, 눌러진 상태인데 송유건도 그 톤에 맞는 역할이었어요. 지금은 전반부에서 잔재미를 드러내죠. 이런 부분들을 감독님과 계속해서 논의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셨어요. 감독님이 멋지게 잘 만들어주셨어요. 이게 포인트에요.(웃음)”
‘프리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자 매력적인 부분은 교도소라는 공간의 활용이다. 대중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교도소 구조를 넘어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극에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실제로 20여 년 간 실제 재소자들이 생활했던 전남 장흥 교도소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온갖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지만, 실제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낯설었을 테다.
“처음 갔을 때 느꼈던 음산하고 싸늘한 기분은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느꼈던 것 같아요. 그 공간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일부러 현장에 일찍 가거나, 촬영이 일찍 끝나도 교도소 운동장에서 놀기도 하고 죄수복도 계속 입고 있었어요. 죄수복이 또 편하더라고요.”

이 영화에서는 여성 배우가 없다. 말 그대로 ‘수컷’들의 전쟁이다. 끊임없이 치고 박고 싸우고, 온 얼굴과 몸에서 피범벅이 사라질 날이 없다. 흥미로운 건, 일상적인 제소자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대단히 준비된 액션을 선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어쩔 때는 ‘개싸움’ 같기도 하지만 또, 어쩔 땐 싸움의 고수들 마냥 묵직한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너무 무기가 없으니까 관객 분들에게 보이는 게 없지 않나 싶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래서 화려한 발차기나 액션들을 넣자는 말도 나왔는데 저는 반대했어요. 감독님도 그러셨고요. 형사 역할이기 때문에 유도를 많이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업어치기 등이 많이 나오고 화려한 액션은 많이 배제시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가 화려하게 잘 나온 것 같다고 전하자 “저는 대단하게 느끼지 않았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어요. 그 정도는 맞아야죠.(웃음) 예전에 ‘해바라기’할 때는 일주일동안 링거를 맞고 4번 기절도 했는데요.”

‘프리즌’을 통해 처음으로 연기 호흡을 맞추게 된 한석규는 김래원과 실제로 7~8년 동안 깊은 친분을 자랑하던 형이자 대선배다. 매번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2박 3일간 함께 잠을 자고 생활한 내공 덕분일까. 촬영 현장에서, 막강한 친분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여실히 쌓여진 신뢰는 연기 호흡에 힘을 더했다.
“오히려 소통하는 데에 있어서 편했어요. 가깝게 지냈다고 해서 다른 배우 분들도 있는데 저만 ‘형님. 형님’하면 안 좋게 보실 수도 있잖아요. 오히려 더 깍듯하게 했어요. 다행히 선배님이 먼저 마음을 열어주셨고 배려를 해주셨어요. 너무 그러지 말고 편하게 의견 내고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해주셨죠. 그리고 제가 어느 날 촬영장에서 독립적으로 있으면 감정 때문에 준비하고 있는 걸 바로 아세요. 아마 스태프 분들께도 말씀하셨을 거예요. 지금 감정 잡느라 혼자 있을 것이라고.”
김래원은 인터뷰 내내 ‘도구’라는 말을 연이어 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감독이 원하는 바를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도구로 자신을 칭하고 있었다. 주연으로써 분명히 해내야할 몫은 있지만, 극을 만들어낸 감독에 대한 존중과 자신감으로부터 발현된 이야기였다.

“어쩌면 20대 당시의 제가 ‘팬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멋지게 보일까’ 고민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물론 그 때도 팬을 얻거나 여심을 사로잡기 위해서 연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지 않죠. 그저 극에 충실하고 감독님이 얘기하려고 하는 방식이 제 마음에 들면 그 감독의 좋은 도구가 되면 되니까요.”
이어 “전에는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써봤어요. 고집도 세고 패기와 열정 많던 어렸을 때의 제가 고집 부려서 드라마가 잘 되기도 했고, 안 되어보기도 했어요. 어떤 작품들은 전적으로 믿고 따라보자 해서 했는데도 안 된 경우도 있고요.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지금의 생각을 얻은거죠. 결론적으로, 저는 감독의 피조물이에요. 좋은 도구로 그저 잘 쓰이면 되는 것이죠. 물론, 좋은 도구가 되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서로 부족한 걸 채워가면서 같이 만들어가야죠.”
김래원의 20년 연기 내공은 단순히 발현된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젊음으로부터 오는 패기와 열정이 있었고 그 이후 성숙된 고뇌를 거쳐 지금의 김래원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이제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게 만들 여유까지 생겨났다.
“‘프리즌’이요? 사실 보이는 대로 보시면 좋죠. 굳이 말하자면, 공포와 잔인함으로부터 오는 스릴과 쫀쫀함을 느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쉽고 만만한 역할은 아니라 신경 많이 썼어요.(웃음)”
이예은 기자 90090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