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무감정의 눈빛, 툭툭 던져지는 대사들, 느릿한 걸음, 비릿한 미소, 이 모든 것을 두른 악랄한 최규남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저 시종일관 능글맞은 웃음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장혁이 앞에 앉아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도 언제 장난기 가득했냐는 듯, 진지하게 삶을 펼쳐낼 때는 박수까지 보내고 싶었다.
대한민국 현대사 중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기라고 불리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보통사람’에서는 그 험난했던 시대적 애환 속에서 상식이 통하는 시대를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장혁은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타이틀을 단 냉혈한 안기부 실장, 최규남 역을 맡았다. 극중 최규남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독한 행위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이다.

인터뷰는 단 한순간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코미디 잘한다’ ‘액션도 잘한다’ ‘잘생긴 건 타고난 것이다’ 등 쉴 새 없이 스스로 늘어놓는 그의 자랑 속에서도 진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모두 철저한 노력과 여전히 그가 지닌 열정이 만들어낸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배우의 삶을 이야기할 때, 명확하게 소신과 신념을 늘어놓는 장혁을 보며 그의 깊이를 예감케 했다.
Q. 만족스럽게 영화를 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어떤 말을 건넸나
“‘용띠클럽’(장혁이 속한 연예계 친분 모임)은 많이 참석들을 못했어요. (차)태현이만 왔는데 아직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그래도 그 친구 성격상 욕이 안 나오면 나쁘지 않다는 해석으로 들어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꾸미지 않아서 좋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도 촬영장에서 많은 카메라들의 구조와 샷들이 있는데 불편하지 않았어요. 카메라가 배우를 가두는 샷은 없었거든요. 그냥 넓게 놓았어요. 움직여야하는 상황이라면, 연기적인 부분이 끝난 뒤에 찍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배우들에게 장소 제공을 해준 듯한 느낌이었어요. ‘알아서하세요’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배우들끼리 소통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Q. ‘보통사람’을 선택하게 만든 매력적인 요소들은 무엇이었나
“(손)현주 형과 영화에서 같이 영화를 해보고 싶었던 게 컸어요. 제가 ‘타짜’라는 드라마에서 처음 뵈었는데 그 때는 ABC팀으로 촬영을 돌다보니 정신이 없었어요. 현주 형과 연기적인 이야기를 시간제한 없이 할 수 있는 곳에서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만나게 된 게 ‘보통사람’이죠. 그리고 안타고니스트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40대 초반이니까 지금 스펙트럼을 많이 넓혀놔야, 중후반으로 가서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의뢰인’, ‘순수의 시대’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에요.”
Q. 최규남이라는 인물, 정제되어있지만 그만큼 또 잔인하다.
“맨 처음 제가 검찰에게 하는 대사가 ‘신념을 가지고 소신을 가지고 가면 그게 맞는 길이다’에요. 이것은 규남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일에서 소신이 정확히 있는 거예요. 그 당시는 지금의 SNS와 같은 것들 없이 통제와 교육이 가득한 군부독재잖아요. 그런 시스템 안에 있던 인물이 되다 보니까 규남 캐릭터는 그럴 수밖에 없던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죠. 전체적으로 ‘보통사람’은 정치 이야기나 그런 색깔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시대를 살아갔던 80년대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제 캐릭터가 복잡한 것 중 하나가 모든 사건의 후미에 있으면서도 선두에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이 인물을 전반적으로는 잘 안보여주고 상황상황에 맞춰 보여주죠. 관객들에게 ‘내가 저질렀어’ 라고 말하지 않아요. 제가 (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 표시를 안 내려고 하다보니까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면서 보게 되겠죠. 처음에 제가 가수의 뺨을 때리잖아요? 이렇게 초반에 강력하게 한 번 나오면 다음에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이 인물은 뭔가 있을 것 같죠. 그런 긴장감을 쭉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감독님은 규남 캐릭터가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 거대한 벽과 시스템이길 바라셨거든요.”
Q.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잔인한 인물이더라도 공감과 이입이 필요했을 것 같다.
“배우는 가장 나쁜 악역도 설득력을 가지고 이해를 시키면서 가지고 가야해요. 반대로 가장 좋은 선인도 설득력을 가져야 하죠. 그런데 그것은 연기하는 순간인 것이고 소스를 건넬 뿐이에요. 영화나 드라마는 그 이후에 편집이라는 가공을 해서 캐릭터를 선보이는 것이잖아요. 배우는 ‘액터’지 ‘에디터’가 아니에요. 즉, 모두 편집이 완성된 전체적인 앙상블 안에서 영화를 보는 거죠. 저도 제 캐릭터를 보면 다른 사람과 똑같은 느낌을 받아요.”

Q. 벌써 데뷔 20주년이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다. 지치지 않는 원동력이 있나.
“열정은 정말 많이 식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제가 복싱장을 가서 복싱을 하는 게 선수생활하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선수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거죠. 그 시간동안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돼요. 특히, 스파링을 하다보면 안 맞으려고 하다보니까 계속 집중을 하잖아요. 그렇게 상대 배우들을 관찰하고 리듬을 세워요. 대사 같은 경우도 정박으로 갈지, 엇박으로 갈지, 침묵할지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제 것을 채워가면서 남에게 던져주고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열정이 식은 상태에서는 보는 사람들도 느끼니까요. 촌스러운데 열정이 있는 것은 더 값어치가 있는 것 같아요.”
“DVD를 모으는 순간을 좋아하는데 특히 제 것을 모으는 걸 좋아해요. 영화 작품을 모은다기보다는 제 옛날 생각들의 잔재를 모으는 거예요. 대본도 안 버려요. 보다 보면 참 유치하게 쓴 것도 있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싶은 것도 있어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소화해내면 결국 뒤에 놓이면 추억이 되기 마련이죠”
Q. ‘보이스’도 종영했고, ‘보통사람’도 개봉한다. 이 틈에서 장혁의 소소한 행복은 무엇인가.
“집에 있는 순간들이 행복해요. 확실히 애기들 잘하는 걸 보는 게 제일 행복하더라고요. 그게 제일 첫 번째다. ‘대부’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 속에서 알파치노의 캐릭터를 보면 사랑했던 여자를 잃게 되고 가정을 위해서 살았던 남자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잖아요. 참 안쓰러웠던 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인물이 무섭게 변한 건데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가족들의 생각은 못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도 지금부터라도 애들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순간을 가지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집에 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소소한 그 순간들은 계속 가는 게 아니니까요.”

Q. 여전히 액션과 코미디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배우로써 별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나
“아직 확실히 모르겠어요. 저 어릴 때는 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알파치노가 전부였어요. 한 배우는 굉장히 깊숙이 들어간 배우고, 한 배우는 이것저것 펼치는 배우에요. 어떤 배우가 대단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던 간에 그 두 가지를 잘 버무리고 싶어요. 인물이 소화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한정적인 것은 없는 것 같아요.”
“호감 있게 살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계속 웃으면서 살려고요. 사람 얼굴은 노화될 수밖에 없고 인상은 변하잖아요. 그래도 어떻게 하면 호감 있게 보일지 생각하면서 화를 내기보다는 웃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정확하게 생각을 하며 살아가려고요.”
이예은 기자 90090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