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비담과 심건욱의 절절한 눈빛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던 김남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독을 나누던 김남길으 사라지고 현실 속에 있는 그는 정확히, 그 반대의 너머 끝에 서있었다.
우수에 찬 눈빛이 전매특허라고 건네는 말에 “미세먼지 때문이에요. 제가 안구건조증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하며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인물이다. 이러한 간극이 너무나 즐겁고 반갑게 느껴지는 배우 김남길이 ‘판도라’ 이후 다시금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돌아왔다.
영화 ‘어느날’은 아내가 죽은 후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된 강수(김남길 분)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세상을 처음 보게 된 미소(천우희 분)이 서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극중 김남길은 두 달 전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보험회사 과장 강수로 등장해 무겁지 않은 캐릭터 속에서 심도 깊은 감성을 선보인다. 강수의 유쾌한 면모는 꼭 김남길을 닮아있었다. 하지만 제 옷을 입은 것처럼 소화해낸 것과 달리 김남길은 작품에 출연하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그 때 당시에는 영화는 묵직해야하고 사실적인 것을 다뤄야한다는 강박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장치적인 요소로 판타지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괜찮을까 우려했죠. 또, 강수가 느낀 아픔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고 표현하기에는 불편한 게 있었어요. 어른 동화 같은 느낌이 강해서 저보다 더 순수한 배우가 표현을 하면 착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웃음)”
하지만 결국 ‘어느날’과 만난 김남길. 결국 공감에 이르고 시나리오를 보며 눈물까지 흘렀다고 전했다.
“보통 제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무언가가 다르게 보이는 건 알지만 유독 어느 순간, 강수가 가지고 있는 아픔과 죄책감이 더 많이 다가왔어요. 특별한 계기도 있던 것도 아니에요. 시나리오를 보면서 울기도 하다가, 제가 지금 느낀 정서를 관객 분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윤기 감독님이 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풀지에 대한 기대치도 생겼어요. 무거운 소재일 수도 있는 것을 편안하게 풀어놓으면 재미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천우희 씨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 천우희 씨도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상업적일 수는 없는 영화니까요. 어느새 우리나라에서는 ‘천만영화’가 성공의 기준이 됐어요. 옳은 영화일 수도 있지만 좋은 영화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데 말이죠. 저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배고픔이 많았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천우희 씨랑 ‘어느날’ 같은 영화가 잘 되어서 힘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날’은 남녀 간의 사랑과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내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윤기 감독의 작품으로, 신작인 이 작품에서도 멜로 소재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조금도 멜로가 없다. 이 감독이 ‘멜로’ 없는 감정 치유를 통해 색다른 결을 시도한 것이다.

“(천)우희와 제가 캐스팅이 되고나서 주변에서 ‘센 것만 하던 애들이 뭐하냐?’ 라고 하시다가 이윤기 감독님이랑 하니까 ‘멜로겠지’ 라고 하는 편견도 생기더라고요.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고 아픔을 치유해 가는 게 꼭 사랑을 통해서만 되지 않잖아요. 각기 아픔들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도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멜로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다른 쪽으로 비춰지고 왜곡될까봐 경계했죠.”
충무로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평가 받는 천우희와의 호흡도 남달라 보였다. 촬영 현장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온 천우희를 향해 ‘형제’같은 후배라고 표현한 그로부터 그녀에 대한 단단한 신뢰감과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짓궂은 표현의 장난을 치다가도, 극찬을 이어간 그는 실제로 인터뷰 당일에도, “지금 (천)우희가 제가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있겠죠?”라고 중얼거려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제껏 해왔던 작품들과는 다른 모습에 기대치가 있었어요. 같이 만나서 작품을 해보니까 연기 센스도 되게 좋고 공동 작업에 대한 인식도 되게 좋더라고요. 이기적일 필요가 가끔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많이 배려를 해줬어요. 어리면 어릴 수도 있고 많으면 많을 수도 있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 나이지만 본인이 중심을 잘 잡고 있는 생각들이 들어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에요.”
이윤기 감독을 향한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마냥 칭찬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어린 아이가 투정 부리듯이 고충을 털어놓기도 하고, 개구진 표정과 함께 이 감독의 성대모사를 하는 그의 얼굴만 봐도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감독님은 정말 독특하세요. 고집도 있으시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중요한가?’ 싶은 것들도 꼭 중요하게 여기시고 가져가세요. 배우들이 연기하는 감정과 시간과 공간이 같이 조화를 이루시길 바라시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신경질도 내세요.(웃음) 그리고 배우들한테 많이 맡기는 스타일이시라 우리가 느끼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세요. 기본적으로 배우에 대한 믿음이 있으신 분이에요.”
‘어느날’의 강수는 영화 ‘해적’의 장사정과 드라마 ‘나쁜남자’의 심건욱 그 사이다. 물론, 두 인물에 비해 일상적이고 입체감이 덜 하긴 하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어 강수의 내면을 살펴보면, 드러난 유쾌함과 숨겨져 있는 내면의 아픔 사이의 그 거리감이 상당하다. 김남길은 이 간극을 물 흐르듯이 채워냈다.
“어렸을 때 했던 깊은 사연을 지닌 남자나 고독에 대한 연기들보다는 편안하게 풀어진 연기를 해서 보시는 분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간이 갈수록 작품을 선택할 때, 이야기의 힘이 있는 작품을 더 선택하게 돼요. 사실 누구나 강수처럼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과 아픔들이 있을 거예요. 내 아픔이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까지 용기 있게 전면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로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이예은 기자 90090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