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불한당', 부활의 신호탄 알린 설경구

기자 2017-05-23 16:39:19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설경구는 역시나 설경구였다. 힘은 뺐지만 강한 존재감은 물론, 섹시함까지 갖춰 본때를 보여줬다.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범죄조직의 1인자를 노리는 재호(설경구 분)와 세상 무서운 것 없는 패기 넘치는 신참 현수(임시완 분)의 의리와 배신을 담은 범죄액션드라마로, 제70회 칸 국제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공식 초청되는 쾌거를 안으며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극중 설경구는 모든 것을 갖기 위해 불한당이 된 남자, 재호 역을 맡아 동물적인 연기력을 무서울 정도로 펼쳐냈다.

그는 한재호를 완전히 자신에게 덧씌웠다. 한재호가 지닌 호쾌함과 대담함 그리고 그 안에 가려져있는 불안감과 상처까지 온전히 연기로 펼쳐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이러한 표현의 일환으로 설경구는 특히 힘을 준 구석이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웃음소리. 어딘가 인위적인 것 같지만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복식 웃음(?)’에 가까운 웃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귀를 사로잡는다.

“원래는 그런 게 없었어요. 촬영 중에 ‘한재호라는 인물은 교도소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내레이션이 들어가는 몽타주 씬이 있었는데 대사도 못 하겠고 뭘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웃자고 생각해서 막 웃어봤어요. 그랬더니 계속 이렇게 웃으면 안 되냐고 하길래 튀지 않으냐고 물었죠. 마음에 들었나봐요. 그래서 심심해도 웃고 혼자 있어도 웃고 말하다가도 웃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웃음은 가짜에요. 불편하고 불안해 보이고, 심리를 감추고 싶고 막을 치고 싶은 가짜 웃음이에요. 마지막에 웃는 게 재호의 진짜 웃음이라고 생각해요. 체념과 현수에 대한 애정으로 나온 진짜 웃음이라 마지막 웃음이 제일 좋아요.”

 

사실 올해 초 개봉했던 ‘프리즌’과의 비교도 피할 수는 없었다. 언더커버라는 동일한 소재를 지녔고 교도소 배경, 남자들의 피 터지는 싸움까지 유사한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두 작품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감정의 흐름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뿐 만 아니라, 변성현 감독이 기어코 신선한 연출과 미장센에 감긴 신선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온전히 드러난다. 실제로도 미술 작업과 직접 함께 콘티 작업을 하면서 사무실의 세트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변 감독의 손을 안 거친 게 없다고.

“감독과 기시감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 했어요. 그리고 그 즈음에 ‘프리즌’ 촬영이 시작됐고 개봉이 붙을 수도 있다고 했죠. 그래서 감독한테 우리와 출발점이 같다고 말했더니 자신도 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스타일리시하게 다른 길로 갈 거고, 남자 이야기지만 감정을 더 중요하게 다뤄서 봐오던 영화는 찍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못 믿겠어서 다시 한 번 만났어요. 그 때 변성현이라는 사람이 보였어요. 말 포장도 잘 못하고 거짓말을 못하는구나 싶었죠. 대신, 이 영화에 대한 확신은 강했어요.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어요.”

‘구겨진’ 설경구를 ‘빳빳하게’ 펴낼 것이라는 변성현 감독의 굳은 각오 덕분이었을까. 설경구는 멋들어진 수트 차림과 함께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 역사상 가장 섹시하고 스타일리쉬한 남자로 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인물에 숨을 불어넣는 건 임시완과의 ‘브로맨스(?)’에 가까운 진한 우정이었다. 계속해서 부딪히고 투닥거다가도 함께 웃음 짓는, 그렇게 마치 사랑을 하는 듯한 두 남자가 야망과 배신의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불한당’은 비로소 완성됐다.

“기자간담회 때 감독님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멜로라고 말씀하셨는데 영화 끝나고 들어서 다행이에요. 만약 그런 말을 들은 상태에서 영화를 찍게 되면 되게 고민했을 것 같거든요. 찍으면서 찾아간 부분이 많은데, 처음부터 그런 영화라고 듣고 들어갔으면 (임)시완이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느끼하게 했을 것 같아요. ‘자기’라는 호칭도 시나리오에 있었어요. 그런 애매한 게 묘하게 좋더라고요.”

 

“처음부터 제가 사랑을 생각한 건 아니에요. 시작한 건 김희원 씨였어요. 김희원 씨가 촬영 전에 ‘나는 재호만 짝사랑한다는 콘셉트를 잡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내가 임시완을 사랑해야하나 싶었죠.(웃음)”

사실 범죄액션, 느와르 장르가 이미 만연한 국내 상황에서 ‘불한당’이 이토록 기대와 집중을 한몸에 받는 건, 신선한 배우 조합 뿐만이 아니라 칸 국제영화제 초청이라는 타이틀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임시완은 생애 첫 칸 방문이지만, 설경구는 프로(?)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이후, ‘오아시스’, ‘여행자’ 그리고 ‘불한당’까지 4번의 칸의 부름을 받았다. 대신,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 건 ‘박하사탕’(1999) 이후 17년 만이다.

“(임)시완이는 아무 생각이 없대요. 사실 제가 ‘박하사탕’으로 갔을 때도 아무 생각 없었거든요. 지금의 시완이가 그 때의 저 같아요. 저는 지금 가면 눈에 다 들어올 것 같아요. 칸 초청 소식도 ‘박하사탕’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았어요. 예전의 저는 그냥 멀뚱멀뚱했어요. 영화를 막 시작했을 때 영화제를 워낙 다녀서 어떤 분들은 ‘너는 초반에 힘을 다 썼다’고 말하기도 하셨죠. 특히, ‘불한당’은 칸의 지향점과 달라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가게 되어서 더 반갑고 좋아요. 지금 가면 실컷 즐겨야죠."

그가 유독 칸의 초청과 평단 등의 긍정적 반응에 유쾌한 미소를 내비친 건, 어쩌면 마음 속 짐을 조금은 덜어놓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였던 설경구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었기 때문. ‘서부전선’ ‘루시드 드림’ 등에 출연했던 그는 여전히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지만 흥행에 있어선 고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침체는 대중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본인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와 숙제로 남겨졌다.

“연기를 고민 없이 쉽게 들어갔었어요. 자책이 많이 돼요. 근래 찍었던 몇 작품에서 그랬어요. 그런데 정신이 번쩍 들더니 이러다가 사라질 것 같았어요. 제가 제 자신을 아니까 많이 창피했죠. 그리고 이후에 고민과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에 ‘불한당’과 ‘살인자의 기억’이 잡혔어요.”

그래서일까. 설경구는 다시금 본인이 지닌 저력을 제대로 폭발시켰다. 그리고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다. 단순히 살아난 연기 덕이 아니다. 본인이 몸소 느낀 열정 부재, 그리고 솔직하게 마주한 자신의 치부. 그래서 그는 다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황금으로 물들일 준비가 되었다.

“인생작이요? 여전히 ‘박하사탕’이고 앞으로도 ‘박하사탕’이라고 할 거예요. 일을 막 시작할 때라 경황도 없어서 되게 강렬하게 박혀있어요. 심적으로도 힘들고 미안했고 괴로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으니까요. 갑자기 저한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도 부담스러웠고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전과 후가 나뉘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거든요. 오히려 저는 카메라를 받을수록 꺼낼 카드가 없어져요. 다시 꺼내는 카드도 많아지는데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셔서 못 있겠어요. 그게 계속 반복되는 게 제 지금 위치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