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원톱 액션 영화 ‘악녀’가 갖는 의미

기자 2017-06-16 16:45:00

 

[메인뉴스 이예은 기자] 영화 ‘박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기묘함과 차가운 그림자를 뿜어내며 배우로서 완전한 성장 고지에 올라섰던 김옥빈이, 액션 영화 ‘악녀’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계 안과 밖의 눈은 모두 그녀를 향해 쏠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스크린 복귀작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악녀’가 지닌 ‘여성 원톱 액션 영화’라는 타이틀 때문.

매번 국내 영화의 최대 흥행 장르는 ‘범죄오락’ ‘액션’ ‘느와르’로 언급되며 끊임없이 해당 장르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속에 여성은 없었다. 오로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베일을 벗기도 전인 ‘악녀’를 향해 드러나는 흥분감은 감출 수 없음이 당연했고 더불어 정통성 가득한 제70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쾌거까지 이루었으니 완성도까지 기대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척박한 땅에 피어난 꽃 마냥 새로운 여성 영화의 지평이 될 것임을 기대하며 뚜껑을 열고 살펴본 ‘악녀’는 ‘여성’을 향한 시선에 있어서 여전한 제자리걸음 그리고 여성 영화의 가능성, 이 두 가지를 함께 내비쳤다.

‘악녀’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마치 FPS슈팅게임의 한 장면처럼 연출한 롱테이크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숙희(김옥빈 분)의 1인칭 시점으로 연출한 총칼액션은 환상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무자비하게 살해되는 남성들을 바라보는 숙희의 거친 숨소리와 흔들리는 시선은 쫄깃한 긴장감까지 부여한다.

적들의 숨통을 거침없이 끊어놓는 숙희의 등장은, 등장과 동시에 줄곧 나온 남성 액션을 전복시킬만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자칫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길이이나 핸드헬드를 사용해 전달한 생동감과 화려한 동선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킨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장도리씬을 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뿐만 아니다.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며 칼을 휘두르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오토바이 액션은 정병길 감독의 유례없는 과감한 시도다. 달리는 대형 버스 안에서도 총, 칼, 도끼 등 갖가지의 무기 사용을 자유로이 변주하며 이에 더해진 김옥빈의 맹수 같은 표정은 가히 압권이다.

이 과정에서 정병길 감독은 액션의 주체가 여성임을 잊게 만든다. 남성과 구분 짓기 위해 대표적으로 표방되었던 부드러움이나 유연함 혹은 굴곡짐은 드러나지 않는다. 즉, ‘여성 액션’에서 ‘여성’이라는 테마가 부각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김옥빈의 최대치를 이끌어내 성별 구분 없는 완성형 액션을 그려놓았다. 또한 함께 조직에 속한 배우 조은지의 연기적 활약도 놀라운 발견이다.

일각에서는 현수(성준 분)와의 로맨스 전개가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으나 액션 영화의 진입장벽을 깨기 위한 정병길 감독의 시도로 보면 크게 거슬리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액션 장르의 한 획을 그을만한 휘황찬란한 무술을 디자인한 희귀한 여성 영화라 하여, 마냥 찬사만 보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액션을 펼치는 것과 달리 김옥빈 속에 담긴 서사는 지금껏 표현됐던 여성 캐릭터의 한계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

애초부터 어린 시절 고도의 훈련을 받고 최정예 킬러로 ‘길러진’ 숙희이기에 수동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건, 불가피한 일이나 숙희의 변화나 결단의 요인은 ‘남성’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권력 우위에 점령해있는 남성 캐릭터들과 마주할 때면 숙희는 강력한 돌파조차 하지 못하고 내면에 자리 잡은 연약함이 고개를 든다.

이는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이자 남성이 바라보는 ‘감정’에 매몰된 편협한 여성성을 그대로 고착시킨 것이다.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린 숙희가 과감하게 그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벌이는 복수는 약간의 허탈함까지 느껴진다.

더불어 모성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숙희의 삶을 휘감은 건 안타깝다. 물론 영화 안에서 개연성을 지닌 전개이긴 하나, 언제나 여성에게 필연적으로 붙는 ‘결혼’과 ‘아이’를 두른 사연이 활용된 것은 오히려 여성이라는 주체를 국한된 상황에 가둔 것처럼 느껴져 의아하다. ‘악녀’가 드러낸 여성 액션은 진보했지만 여성 캐릭터는 여전히 유보상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녀’의 등장은 그 자체로 파격적 이슈다. 첫 술에 배부르랴. “‘악녀’의 등장으로 여성 주인공 영화가 활기를 띠길 바란다”는 배우 김옥빈의 책임감과 정병길 감독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는 분명, 여성 캐릭터 등장 자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선물했다. 앞서 언급한 한계를 진전시키고 더 나은 수많은 여성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