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뉴스 이소희 기자] 매 작품이 끝날 때마다 배우들에게 따라오는 수식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재발견’이라는 표현은 극중 캐릭터에 완벽하게 빙의해 굉장한 몰입도를 선사하거나, 전작과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줘 반전을 드러낸 배우에게 잘 붙는다.
최근 SBS 드라마 ‘귓속말’을 끝낸 권율에게는 전자의 의미로 ‘재발견’ 수식어가 붙었다. 극중 권율은 법률회사 태백을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엘리트 변호사 강정일을 연기했다. 강정일은 분명한 악역이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끝없이 달리며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인물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대본을 안 봐도 되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웃음) 대사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 신이 많아서, 대사가 입에 착 붙지 않으면 안됐거든요.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매주 단어시험 보는 느낌으로 계속 대본을 들고 다니면서 불안해했어요.”
솔직한 답변이었다. 반면 그만큼 권율이 강정일을 유려하게 표현하기 위해 지긋지긋할 만큼 노력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역대급으로 고생한 드라마”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감정적으로 거의 극한의 상황까지 나를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어요.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허구인 것을 알아채고 연기를 보지만, 저는 그런 마음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내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두세 배는 더한 감정을 끌어올려야 그게 화면을 뚫고 나가서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거죠.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촬영을 했어요.”
온갖 집중력을 끌어올려 공부를 하다보면 금세 체력이 바닥나듯, 캐릭터에 빙의되는 연기도 그렇다. “감정소모 때문에 체력적으로 더 힘들었겠다”고 하자 권율은 매우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더 열심히 운동할 거예요. 드라마는 체력싸움인 것 같아요. 30대 중반이 돼서 더 그런 걸 수도 있는데, 드라마는 순간 몰입하고 집중해야 하는 불가항력적인 제작환경이 있잖아요. 한두 시간 자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베이스가 되어야 하고, 체력관리를 잘 하는 게 연기를 잘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권율이 다각도의 연기를 보여준 것은 캐릭터 덕분도 있지만, 그의 연기관 때문도 있다. 그는 “한 톤으로 16부작을 유지하는 건 힘들다”고 했다. 매회 끝판왕을 보여줘야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작 tvN 드라마 ‘싸우자 귀신아’에서도 악역을 맡았던 권율은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악역을 표현해내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전작은 악귀가 빙의된 악역이었고, 이번 캐릭터는 단편적으로만 보고 악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악행을 저지르긴 하지만 ‘나는 저기까지 갈 거야, 건드리지마’하고 쭉 나아가는 마음이 강한 거예요. 그래서 악의 기능으로만 쓰이진 않았던 인물 같아요. 악행이 합리화될 수는 없지만, 드라마니까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고 목표가 있죠.”
그렇다고 권율이 악역만 찾아다닌 것도 아니다. 분명 권율은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주로 출연했고, ‘밀크남’ 수식어까지 얻었다. 그는 “안 먹어봤던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다. 부드러운 이미지 속 안 해본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악역을 하면 스펙트럼이 넓어질 거야’ 그런 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귓속말’에 캐스팅된 것도 감독님이 영화 속 제 악역 연기를 보셔서 제안한 거예요. 이전에 보여줬던 이미지와 강정일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도 악역을 한다 해도 이미지 고정에 대한 의식은 없어요. 그저 그때 들어오는 작품 중 가장 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작품에 끌리는 거죠. 그게 다른 얼굴이 되어 한 장 한 장 쌓인다고 생각해요. 피디님들이 각자 작품에 맞는 얼굴, 종이 한 장 한 장을 찾아 꺼내볼 수 있게끔 쌓아가고 싶어요.”
목표를 정하면 그곳만 바라보고 돌진하는 강정일의 모습에는 어느 정도 권율의 성격이 묻어 있는 듯 했다. 물론, 강정일처럼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해놓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며 피땀을 흘린다는 점이 비슷하다.
“저는 목표 수정도 많이 하지만, 정해지면 지키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아요. 배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다 각자 자기 직업에 대한 프로페셔널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제 직업이라서 그래요. 이 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 목표는 시청자들의 공감이에요. 공감되는 배우가 돼서, 시청자들이 한시름 놓고 저와 함께 웃고 울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나는, 운동을 하기로 했지만 오늘 오후 5시쯤 되면 인터뷰를 너무 많이 했으니 운동은 내일 해야겠다고 합리화하는 사람 ”이라며 털털하게 웃던 권율이지만,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더없지 까다로웠다.
“이번 역할이 터닝포인트냐고요? 저는 매 작품이 기회이자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든 공감 받지 못했든, 상업적이든 아니든 매 작품 권율의 필모그라피로 남기 때문이에요. 이번 작품은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캐릭터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졌을 뿐이죠. 지금은 감정적으로 좀 지치고 머리도 많이 써왔어서 다음 번에는 몸이 고된 액션을 하고 싶어요. 몸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나가는 역할이요. (웃음)”

권율은 거듭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성장과정을 본다면 분명 권율은 계속해서 주목해야할 배우다. 본인도 대중들의 호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무슨, 작품이 끝날 때마다 재발견된 배우라고 해주시더라”고 농담을 던지며 멋쩍게 웃는 걸 보면 말이다.
“악역이 처음이 아닌데도 자꾸 재발견이라고 해주시고. (웃음) 감사하지만 거기에 도취되어 있지는 않아요. 보이지 않는 배우, 스태프들이 다 도와준 덕이죠. 오히려 전 반대에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히면 ‘쉽지 않구나’ 느끼는 스스로를 재발견하죠. 많이 깨지고 부딪히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보잘 것 없이 하고 있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게 힘들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해요. 이렇게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하는 모습을 보고 격려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어쨌든 배우의 몸과 생각을 거쳐 또 다른 모습을 표출하는 사람이기에, 배우 스스로가 마음의 창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런 권율의 태도가 그의 몸뚱아리를, 스크린을 뚫고 나와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연기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래서 연기를 못했어’ 이런 건 다 변명이고, 오롯이 연기로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매 순간 매 작품마다 저의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고요, 그 용기를 끌어내고 싶어요. 다음 작품에서도 인간 권율로서도 신뢰가 갔으면 좋겠어요. 더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게 재발견인 게 아니냐고요? 그쵸, 그렇죠 웃음). 늘 재발견되고 싶습니다. 하하.”
이소희 기자 lshsh324@naver.com 사진=김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