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아름다운 곳] 남한산성-아팠던 숨결 아직도 들리는 듯

메인뉴스_관리자 기자 2017-10-10 13:43:02

1636년 12월(인조 14) 1일 심양,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압록강을 건넙니다. 청군은 의주를 지키던 임경업 장군을 따돌리고 한양으로 급속 진격합니다.

 

‘형제의 관계’를 넘어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며 변방에서 약탈을 일삼던 후금 청나라는 척화배금(斥和排金)으로 맞선 조선을 공격합니다.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14일 밤, 청 전위부대와 인조(仁祖)와의 거리는 십리(4km) 남짓, 말 타고 달려오면 4~5분 거리, 위기일발 상황. 청군이 이미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에 도착한 상황인데 인조는 숭례문에서 강화도로 가느냐 마느냐 갈팡질팡합니다. 이때 병조판서 최명길이 청군에 술 한 잔 따르며 시간을 끈 사이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북한산의 북한산성과 더불어 남한산의 남한산성은 한양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인 산성입니다. 위기 때 왕이 피신할 행궁이 이곳에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 日長城)으로 축조했던 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곳에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인조는 자신이 1624년(인조 2) 다시 축성에 들어간 이 성에 병자호란을 맞아 피신하게 됩니다.

 

인조는 인조반정(1623년) 공신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1624년) 난(이괄의 난)을 일으키자 진압 후 축성에 나선 것입니다. 성은 주로 8도의 승군을 동원해 쌓았고 그 영향으로 성 안에 장경사, 옥정사 등 7개의 사찰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47일 간의 항전, 하지만 차남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피신했던 강화도 전선이 무너지자 1637년 1월 30일, 고립무원이 된 인조는 결국 삼전나루터(지금의 석촌호수)로 내려와 청태종에게 굴욕의 무릎을 꿉니다. 이 굴욕은 패배보다 더 한, 11개 항의 이행 조건문에 있습니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많은 신하가 청으로 압송되는 또 하나의 굴욕을 감수하고 그 자리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웁니다. 삼전도(三田渡)는 남한산성과 함께 굴욕의 현장, 굴욕의 역사를 남긴 자리가 됐습니다.

삼전도에 세운 굴욕의 대청황제 공덕비.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조선은 명과 완전히 관계가 끊기고 청에 예를 다 해야 하는 신하의 국가가 됐습니다.

 

이 오랑캐를 물리치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남한산성으로 향하다 굴욕의 항복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많은 이가 자결했고 또한 살아 수치스럽다고 은둔했는지 그 수를 알 수가 없습니다.

 

8월 하순 휴일,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남사모)’에 어떤 인연으로 함께 산행을 떠났습니다. ‘남사모’, 왠지 저에게 친숙하게 들릴 것 같은 명칭이지만 그 의미는 저의 편이 아닙니다. ‘세계유산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입니다. 남사모는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 지킴이이자 환경을 보전하는 우리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의 모임입니다.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철학박사 전보삼 남사모 명예회장님의 안내로 30여 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남문주차장에서 출발한 걷기는 곧바로 전승문(全勝門)으로 향합니다. 흔히 북문으로 불리지만, 싸워서 전승을 올린다는 문이기 때문에 전 명예회장님은 전승문이라 불러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으로 그 의미를 살려 부르는 게 마땅합니다. 당연합니다. 고유의 특성을 담은 이름을 살려야 합니다.

전승문(북문)
바깥쪽에 걸린 현판. 적이 이 현판을 보면 놀라서 달아날 것입니다.

전승문에서 우측 성곽길을 따라 걸으니 전망 좋은 곳에 이릅니다. 하남시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지고 멀리 강북의 수락산도 보입니다. 우측의 벌봉 아래가 법화골이고 그곳에 법화사지가 있습니다. 법화사는 청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공격에 나선 청 태종의 매부 법화장군(法華將軍) 양고리(楊古利)가 이곳에서 전사하자 청태종이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찰입니다.

그 아래쪽은 예로부터 세곡창고가 있어 상사창리, 하사창리라 부릅니다. 이곳을 흘러 하남시를 관통하는 덕풍천은 ‘남한산성 1번지’로 불리는 벌봉에서 발원합니다.

남한산성 길

 

발 아래 하남시, 멀리 수락산도 손에 잡힐 듯.

 

이곳에서의 전망은 언제나 좋지만 잠실 롯데 123층의 화려한 불꽃놀이 관람 최고의 숨은 명소라고 전보삼 명예회장님은 팁을 주십니다. 123층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불꽃쇼 관람의 최적 명소는 남한산성입니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분들의 사연도 재미 있습니다. 전보삼 명예회장님은 1990년 서울 개포동 집을 정리해 들어오셨습니다. 이유는, 유럽 여행 때 성(castle)에서 숙박과 여행을 하며 느낀 점이, 우리나에도 성이 많은데 제대로 문화를 꽃 피우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곳 성 내에서 생활하시는 성주(城主)인 셈입니다.

김동수 선생님은 식사하러 왔다가 식당 주인이 ‘와서 살아라’란 말에 무심코 들어와 살게 됐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멋진 한옥의 주인공이십니다.

거의 매주 오신다는 최종섭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걷다가 앉아서 이야기 하기도 편리하고 소나무숲이 너무 좋으며, 성곽의 곡선미가 정서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남한산성 예찬론을 펴십니다.

또한 세종대왕의 20세손 이규봉 선생님과 이야기 하며 걸으니 마치 600년 전 역사 속 세종대왕이 아닌, 살아계시는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듯 합니다.

남한산성엔 총 5개의 옹성이 있는데 북서쪽의 연주봉 옹성은 멀리서 바라봐도 무척 아름답습니다. 연주봉 줄기는 북으로 뻗어내려 한강에 닿을 듯 말 듯하니 한강의 물 기운을 산 위로 빨아올리는 형세입니다.

지형지세를 잘 활용한 멋진 성곽임에도 굴욕적인 패배를 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곧 이어 만난 제1군포지. 남한산성엔 총 125개의 군포가 있다고 전 명예회장님은 말씀하십니다. 특히 제1군포지는 바로 안쪽 숲 속에 있는 옥정사와 관련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 직전 일제가 이 군포의 화약과 화기를 옥정사로 옮겨 폭발시키는 바람에 옥정사와 산성이 대거 파괴됐다고 합니다.

옥정사지를 지나면 제3암문이 나오고, 다시 조금 더 나아가면 벌봉과 연결되는 동장대 터가 있습니다.

돌 하나만 남은 옥정사지.

동장대 터에서는 옛 성벽과 새로 축성한 성벽이 공존합니다. 낡아 허물어진 성벽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견뎌온 작품의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걷다 보니 성곽 전문가의 여장과 타 등 성(城)의 용어와 용도에 관한 세세한 해설이 곁들여집니다. 성곽에 쌓은 담장을 여장(女墻)이라고 하는데 ‘여자의 치마’와 같다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또한 의학박사 이제호 선생님의 미니 건강특강도 쏠쏠한 재미를 더합니다.

신구 성벽의 만남. 새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 본성 길을 따라 내려가면 현존 사찰인 장경사가 나옵니다. 이 사찰은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원된 승군을 이후에도 주둔시켰는데 이 때 숙식을 해결했던 사찰입니다.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남한산성 관통도로와 접한 지점에 좌익문(동문)이 작은 계곡 너머에 있습니다. 급경사 위로 끊기듯 이어진 성벽,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안타까운 점은 도로 때문에 여기서 길 건너편까지 성곽은 끊긴 상태입니다. 달리 방법도 있었을텐데…

 

장경사.
절벽 위 난공사.

이제 도로길을 따라 남문주차장에 거의 이를 때쯤이면 아름다운 정자 지수당을 만납니다. 1672년(현종 13) 부윤 이세화가 건립했다는 이 정자는 지금은 ‘ㄷ’자 연못 위에 운치 좋게 서 있습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하며 선비들의 시담이 오갔을 자리입니다. 

한여름에도 응달길이 되어 시원한 산책을 하게 해준 이날의 남한산성 걷기는 2시간 20분간 소요됐음에도 지극히 일부만 봤을 뿐입니다. 남한산성은 중앙의 행궁과 서쪽의 수어장대 등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세계인의 유산입니다.

점심식사 후 일행 중 일부는 전보삼 선생님의 안내로 만해기념관에서 관람과 차담을 나누며 남한산성의 가치를 공유했습니다.

지수당
세계유산 남한산성.